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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문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 제공
통영 앞바다, 한산도, 세병관, 충렬사 등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와 자료를 만나보세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관한 자료를 기증하실 분들은 자료실(649-8093)으로 문의바랍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알아보자

가계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그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변(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거(?)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백록(百祿)이 조광조(趙光祖) 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후로는 아버지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출사와 관직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행히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중앙에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왜침에 대비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에 대해 알아보자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장졸을 이끌고 동래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옥포대첩

4일 새벽 출항을 하니, 이때 선척은 전선 24척, 협선(狹船)15척, 포작선(鮑作船)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화시(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당항포 대첩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그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그는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와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같이 그는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陞品)되었다.

한산대첩

그뒤 그는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그는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그는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陞階)하였다.

부산포대첩

한산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 현재의 진해시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가토(加藤嘉明)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중이었다.
그는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하였다.
제3차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며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沒雲臺)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지금 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그는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정유재란과 실각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뒤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다음에 다시 있을 대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백의종군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죽음 직전에서 그는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양(漆川洋)에서 전멸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재기용과 명량해전

원균의 패배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기용하게 되었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은 고작 12척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전투를 벌여 적선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사기가 꺽인 조선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하였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 그는 보화도(寶花島: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군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켰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 수만가를 이루게 되었다.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 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정도로 성세를 이루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노량해전과 순국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지 않은 줄로 알고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다.

이순신장군 사후의 존숭에 대해 알아보자

사후의 존숭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亂中日記》·시조(時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현충사가 입사(立祠)되었다.
그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최가 되어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대와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申采浩)의 《이순신전 李舜臣傳》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렸다.